영미권 소설들만 주야장천 읽어오던 본인에게 일본 작가가 집필한 소설은 일종의 청량제 같은 역할을 하곤 한다. 비슷한 한자 문화를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점이 많은 일본이라는 나라는, 같은 공유점의 서로 다른 해석이라는 점에서 항상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특이점이 있다. 이번에 서평 도서로 건네받은 "너의 이야기" 역시 2~3년 만에 손에 들게 된 일본 소설이자 최근 몇 년 사이 전자책 위주로 해오던 독서 라이프에 이단처럼 내려진 종이책인지라 오랜만에 가슴 두근거리며 읽어나간 듯하다.
작가인 미아키 스가루는 현재 일본에서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웹 연재소설로 데뷔한 작가라고 하는데 흔히 말하는 라이트 노벨 계열의 작품들을 여럿 집필해온 바 있다. 그래서인지 본 작품도 문학 소설과 라이트 노벨의 경계를 아슬하게 오가고 있으며 그 구분이 애매한 점이 있다. 사실 필자는 라이트 노벨과 문학 작품의 차이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하지도 못할뿐더러 그다지 구분하고 싶지도 않기에 폄하한다거나 이를 단점으로 꼽으려는 것은 아니다. 니시오 이신도 다수의 라이트 노벨을 집필했지만 우리는 그를 미스터리 소설가라고 부르지 않는가. 이영도 작가를 매체에서는 판타지 작가라고 부르지만 본인은 우리나라의 위대한 소설가 10명 중 한 명이라고 칭한다. 물론 나머지 9명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 경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래도 나름 장르 구분없이 다양한 독서를 해온 경험칙에 의한 발언일뿐이다.
처음 이 책에 대해 소개를 받았을 때 SF 장르라는 얘기가 있었는데 적극적인 장르로써의 SF라기보다는 극중 내러티브 전개에 필요한 아이템을 구현하는 정도로 그치고 있다. 극중 배경으로 삼고 있는 시간대 역시 간접적으로 미래 사회임을 알수 있지만 그저 지금과 다를 바 없는 시대상을 보여주고 있는만큼 장치적 요소로서의 SF 장르를 채용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문득 밤하늘에 떠있는 달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온갖 상상력이 감성 폭발하던 10대 시절에는 누구나 겪는 일들이 있다. 비록 세계의 운명을 결정 지을 인형 거대 병기에 올라타고 싸우거나 한쪽 팔에 흑염룡을 휘감고 돌아다니는 일은 없을지언정 그 일은 상당한 확률로 이성과 관련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끝은 더 높은 확률로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이들이 본인만은 아닐 것이다.
결핍된 과거를 맞춤양복처럼 잘 재단해 자신의 기억에 끼워 넣는다. 잊고 싶은 추악한 과거나 아픔은 잊어버린다. 아니 잊었다는 사실조차 지워버린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시간 여행을 통해 과거를 조작하는 것과 진배없는 일이 아닐까. 오히려 실현 불가능하다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타임머신 이론보다는 훨씬 현실성 있게 들린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흥미로운 상상력을 바탕으로 많은 것이 결핍된 두 남녀의 미스터리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두 청춘 남녀의 이야기라고 해서 그 안에서 엿보이는 정서들이 풋풋하다거나 상큼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구멍이 숭하게 뚫려 있어 공허하기까지 한 내용들이 독자의 감성을 말려버리는 듯하다.
두 남녀의 가슴 시린 사랑 이야기라며 머리 몸통 다 잘라서 독자분들을 낚아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하지만 사실인걸..)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는 편이 나으리라. 라이트 노벨에 가까운 문체가 많이 보이며 역시나 라노벨에서 봤음직한 전개 과정이나 심리 묘사가 종종 나타나지만 현재 일본 사회가 겪고 있는(그리고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은) 개인과 개인 간의 단절이 야기하는 각종 문제점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기저에 깔고 이를 작가의 독특한 상상력과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은 사랑 이야기이지만..
작품은 시종일관 1인칭으로 서술되며 그러한 형태가 가지는 장점 덕분에 굉장히 섬세한 감정적 묘사를 바탕으로 진행되는데 그와는 반대로 미스터리 요소가 잔뜩 섞여있어서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 유추해보는 맛이 쏠쏠하다. 1인칭 시점이기에 독자 역시 주인공이 보는것만 보고 아는만큼만 정보를 얻을수 있기에 작가도 이 점을 노리고 독자들이 스스로 유추해내도록 다양한 떡밥을 여기저기 뿌려놓고 있고 그러한 요소들이 단순한 맥거핀에 그치지 않도록 결말까지 잘 풀어나가고 있다.
입맛이 쓸수도 있겠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공감 가는 부분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일본 청춘 소설다운 구석도 있고 다양한 일본 미디어 매체를 통해 접해왔던 특유의 어두침침함이 여기저기 희석되어 있다. 장편이라기에는 살짝 모자라고 단편이라기에는 긴, 애매한 호흡이지만 그렇기에 지루함 없이 단박에 독파해버릴 수 있었다.
본 작품의 제목인 '너의 이야기'는 원서의 제목인 君の話을 직역한 것으로 국내에서 큰 유명세를 치렀던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음 직한데 전혀 다른 내용이지만 서정적인 요소나 감정선의 흐름이 비슷한 느낌도 없잖아 있다. 다시 말해서 '너의 이름은'을 재미나게 본 이라면 이 소설도 제법 흥미롭게 읽을 수 있으리라 지레짐작할 수 있겠다.
번역에 대해서는 간신히 히라가나 가타카나 정도만 떠듬떠듬 읽을 정도로 일본어에 대한 조예가 얇기 때문에 뭐라고 하기 힘들지만 글을 읽으면서 딱히 어색하거나 고개를 갸웃거릴만한 요소는 기억나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일본인이 쓴 글이기에 일본식 조어들은 어쩔 수 없으니 넘어가도록 하고. 또한 가능한 한 작가가 의도한 뉘앙스를 살려내기 위해 노력한듯한 부분들도 드문드문 보이니 나쁘지 않다. 뛰어남은 없으나 모자람도 크게 느껴지지 않으니 그 어렵다는 평범함에 속한다 하겠다.
책 표지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어지간한 라노벨 뺨치는 섬세하게 그려진 일러스트가 일본 원서와 동일하게 적용되었으며 돋을새김 형식으로 인쇄된 타이틀은 그 위에 반짝이는 질감까지 더한 호화스러운 형태로 책장의 한 칸을 차지하기에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본다. 출판사에서 제법 힘을 낸듯하다. 전자책과는 다르게 이런 맛은 종이책에서만 얻을 수 있으니 아직까지도 책장에서 책을 다 비워내지 못하게 아닐까.
참고로 출판사는 샘앤파커스라는 곳으로 발매한 카테고리를 살펴보니 경제/인문/시/에세이 위주로 다루는 곳인 듯한데 좋은 기회를 주셨지만 죄송하게도 평소에 자주 접해본 곳이 아닌지라 긴 소리는 하지 않도록 한다.
편집 역시 쓸데없이 넓게 조판해서 1권짜리 책을 2권으로 발매하는 꼼수 따위를 쓰지 않고 촘촘하게 수록된 활자들이 370장 남짓되는 공간을 채우고 있어 개인적인 취향에 부합하고 있으나 읽는 이에 따라서는 요즘 책답지 않게 살짝 작은 폰트가 불편하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본인은 마음에 드는 책이라면 곧장 반복해서 읽는 편이다. 하지만 이 책은 마음에 들었음에도 당분간 재독 하지 않을 생각이다. 읽는 내내 마음 깊숙이 숨겨진 편린을 건드려 대는 통에 쓰라림이 아직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화려한 여름이 가고 선선해지는 가을 즈음 다시 책장에서 꺼내어 아련했던 그때의 여름을 마음속으로 그려가며 다시 읽어나가리라.
-fin.
* 본 서평에는 네이버 eBOOK 까페 서평단 이벤트를 통해 증정받은 책이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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